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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스포) 정신과치료 10년차가 본 조커...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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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병만kimmm
작성일19-11-23 07:38 조회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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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145.png (약스포) 정신과치료 10년차가 본 조커...TXT



 개인적 이야기

나는 조울증과 PTSD, ADHD 등으로 10년 넘게 치료받았다. 매우 강한 마약성 약물치료를 동반하는 길고 힘든 과정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은 유전과 후천적 환경의 결합에 의해 나타나는데, 나의 경우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희한한 조합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모든 인간은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두 인간의 육질적 본성과 정신적 씨앗들, 그것을 둘러싼 환경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탄생하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없던 존재가 탄생한다는 점에서 새롭지만 부와 모의 정신과 육체의 유산에 의해 강력하고 단단한 속박과 한계가 낙인처럼 찍힌다는 점에서 새로울 것이 없다. 나에게 갓난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 가장 비극적인 모순적 존재로 인식된다.(나는 아기를 매우 좋아한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다른 인격체이지만, 존재론적으론 뗄 수 없이 연결된 존재로써 실존한다. 여기서 중요한건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합이 아이에게는 탄생 이전부터 구축된 하나의 소우주이고 세상의 전부라는 것이다. 아이는 10세 전까지 티끌 없는 새하얀 도화지에 부모의 붓으로 그린 그림을 평생 안고 살게 된다. 그 그림은 세계관이자 성격이고 사고방식이며 대물림되는 유무형의 장애이다. 색깔은 부모의 인생에서 흘러나오는데, 잿빛이거나 총천연색으로 밝게 빛나는 색일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 내가 가슴에 품고 산 그림은 수천 개의 회색계단이었다. 이 회색계단 세계에서 절대자인 부와 모는 서로 불화했다.

끔찍한 불화였다.

싸우지 않는 날보다 싸우는 날이 더 많았다.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는 아이들이 소리내어 울면 그 어떤 이유라도 손이 먼저 올라갔고 온갖 욕지거리를 하며 겁을 주어 울음을 그치게 만들었다. 세상에 그 어떤 아이도 그런 대접을 받아선 안된다. 그냥 안되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수천수만 번을 나는 머리속에서 어린 나를 구하려고 발버둥 쳤다. 그런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더라. 새하얀 도화지에 반복해서 내는 생채기는 딱지가 생기고 그 위에 또 상처가 나고 고름이 곪아 터지길 반복한다. 나는 울지 않게 되었다.

나는 영리한 편이었으므로, 금방 분위기를 파악하고 거슬리지 않게 행동하였고, 선악을 구분했다. 포악한 아버지는 악이요, 나를 애지중지하는 어머니는 선이라고. 이 소우주를 스스로 깨는데 삼십년이 걸렸다. 이건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자.

여기서 지독하게 희한한 조합이 하나 발견되는데, 내가 지나치게 영리했다는 것이다. 우울증으로 찾은 병원에서 검사한 내 지능지수는 편차 15인 웩슬러로 145, 흔히 말하는 멘사테스트로 170이 넘는 초고지능이었다.(그러나 이것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초능력이나 신통력은 결코 아니다. 멘사 회원 대부분은 평범하거나 오히려 낮은 성취를 겨우 얻는다.) 또래보다 몇년은 더 빨리 글을 읽었고, 학교수업 대부분이 지루했다. 또래와 어울리기가 매우 힘들었다. 내가 읽는 책은 대개 또래들이 절대 읽지 않는 부류였고(중학교 땐 쇼펜하우어, 고등학교에선 헤겔과 러셀이었다) 중학교때까진 정말 원숭이 우리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고지능이란 단순히 이해력과 사고력, 정보처리 능력이 조금 빠른 것에 불과하다. 대화를 하면 논리 전개가 남들보다 비약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을 또래는 대개 잘난체 한다거나, 이상한 놈이라고 받아들인다. 나는 이해받기가 힘들었다. 빨리 돌아가는 머리로 감정을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남들이 예상되는 반응을 예상해서 먼저 치는게 내가 터득한 처세술이었다. 그럭저럭 사회생활을 해냈다. 그러나 그것은 공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지능이라는 것이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머리로는 누구보다 빨리 이해하고 멀리보지만 정작 성취는 힘들게 하였다.

세상에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이질적이다. 이것은 정말 슬픈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 시작하자.



 아서 플렉 이야기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조커를 보면서 지극히 공감하고 마지막에선 환희를 느꼈다.

아서는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다. ‘이해받지 못함’ 이라는 주제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이해받지 못하는가? 일차적으로 정신병 때문이다. 아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틱장애와 비슷한 것으로 묘사된다. 몇년 전에 본 다큐였나 인간극장 같은 프로에서 욕을 하는 틱 장애를 가진 분이 나왔다. 택시를 탔는데 느닷없이 뒤에서 쌍욕을 내뱉는 것이다. 그 환우분은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는 카드를 건냈다. 틱 장애임을 알리는 카드였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씬과 똑같은 상황이다. (그 다큐에 나온 환우분은 방송 몇년 후 자살하셨다고 들었다)

아무리 병임을 타인이 알고서 양해해 준다고 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욕을 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불가능하게 한다. 양해를 구하는 카드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명확한 절규로도 볼 수 있다. 조커라는 캐릭터의 웃음을 기존 코믹스에서 극적 캐릭터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유쾌한 특징처럼 묘사했으나 그 웃음이 틱장애와 같은 질병임을 영화 초반에서 알려줌으로써 이 영화는 시작부터 코믹스 무비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에 대한 영화로 출발한다.

아서라는 인간은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사회적으로는 완전히 분리되고 소외된 존재다. 아무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한다. 이해는 고사하고 따뜻한 눈길, 미소 같은 것 조차도 받지 못한다. 아서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막이나 마찬가지다.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공감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아서는 죽은 존재다. 그렇게 삭막한 사막이기 때문에 누가 말 한번 걸어주어도, 웃으며 인사를 건내주어도 그것은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 된다. 환상은 단순히 미친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서의 세상이 얼마나 황폐하고 절박한지 보여주는 것이다. 환상을 깨고 젖은 머리로 아래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아서의 모습은 기괴한 정신병자가 아니라 너무나 슬프고 외로운 인간으로 보였다. 이런 사막에서 살고있는 아서의 직업은 광대이자 코메디언 지망생이다. 이것은 앞에서 내가 말한 지독한 희한한(비극적인) 조합이다.

나는 미국식 스탠딩 코메디를 좋아해서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넷플릭스나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봤다) 이는 매우 어렵고 고도의 테크닉과 번뜩이는 천재성이 필요한 재능이다. 조지 칼린, 루이ck, 데이브 샤펠, 빌 버와 같은 코메디언이 스탠딩 코메디를 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힌다. 마이크 하나로 사람들의 웃음과 호흡까지도 쥐락펴락하는 퍼포먼스에 담고있는 주제또한 광범위하다. 언어적 민감성, 풍부한 지식, 말재담, 카리스마, 무대 테크닉까지 정말 온갖 것들이 기반이 되어야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이 모든 것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감정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 통찰을 기반으로 하는데 아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재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아서는 두 다리가 없는데 마라토너를 지망하는 존재다. 안그래도 힘든 인생을 실패와 파멸밖에 없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선택조차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고 조언해주지 않아 세상을 맨손으로 더듬더듬 더듬어서 주먹구구식으로 도출된 것이다. 아서의 희망은 이미 파멸이다.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세상을 그나마 높은 지능으로 겨우겨우 살아냈다. 요령과 처세술로 말이다. 그마저 없었다면 나는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서는 글씨체와 조크 노트를 보건대 경계성 지능으로 보인다. 이는 비극을 아예 저 밑의 진창을 뚫고 지하로 패대기 치는 조건이다. 내가 경계성 지능이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감옥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부터 아서가 지극히 개인적으로, 또 안타깝게 느껴졌다. 아서의 어린시절이 눈에 그려졌다. 히어로 무비 주인공 조커, 영화배우 와킨 피닉스가 아니라 어릴때 옆집에 살았던 나랑 비슷했던 두살 어린 ‘김아서’로 느껴졌다. 눈물이 났다.



 폭력과 알을 깨는 것에 관하여

영화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돌발적으로 튀어 나오는 강렬한 표현 방식으로 나타난다. 언뜻 기타노 다케시 옛날 스타일도 생각이 난다. (하나비의 식당에서 야쿠자 눈에 젓가락 박는 씬)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론 스타일리쉬한 영화적 표현이다. 실제 폭력은 영화속 액션의 시원함이나 감정의 분출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찜찜하고 불쾌한 것이다.

앞에서 내가 말한 나의 소우주를 깨는데 엄청난 진통을 겪었다.영화에서 아서가 어머니와 끝을 내는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아서는 마침내 어머니가 구축한 소우주를 깼다. 어머니 페니의 망상과 아서가 받은 학대를 방관했던 공범자, 가해자 임을 깨닫고 정면으로 깨부순 것이다. 영화에서 표현되는 것도 밝은 창으로 눈부신 빛이 들어온다. 아서는 스스로 한발자국 전진한 것이다.

나도 그처럼 전진하기 위해 부와 모가 구축한 세계를 깨부쉈다. 그것은 폭력적 사건이었다. 나는 내 소우주의 두 절대적인 축인 부와 모를 모두 극복해야 했다. 선과 악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였던 소우주가, 사실은 선으로 포장된 무심한 악과 한심한 악으로 드러났다. 아서와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이었다. 내가 그것을 깨는 그 과정에서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건이 생겼다. 나는 그 장면을 또 하나의 PTSD로 짊어지고 소우주를 깨부쉈다. 현실의 폭력은 머리속이 새하얘지고 구토가 올라오는 찜찜한 것이다. 살인까지 가게 되면 아예 존재가 바뀐다. 영화에 나오는 살인씬 모두 다 현실의 그것과는 달랐다. 아서의 살인은 그의 존재에 어떠한 의미도 없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 책임을 들이대는 해석도 설득력이 없다고 보여진다.

아서의 살인들은 실재하는 사건으로서,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약탈적이고 도덕적 금기를 넘어서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세상을 향해 ‘이해받지 못함’을 절규하는 발버둥이라고 보인다. 여기에서 여타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과 차별화된다. 연쇄살인범들은 희생자의 고통과 그 가족들의 고통을 통해 만족을 얻는 자들이다. 살인은 그들에게 대단한 것이다. 존재론적 만족감을 얻고 자랑하고픈 것이다. 반면에 아서에게 살인은 그냥 세상에게 던지는 조크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영화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모방범죄에 대한 우려는 핀트가 어긋나있다. 아서는 스스로 알을 깨고, 세상에 절규할 뿐이다.



 내가 이해한’조커’

가장 좋았던 장면은 병원에서 기록을 보고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었다. 비통하지만 강렬한 상승과 환희를 느꼈다. 내가 병원을 찾아다니며 내 정신을 어느정도 정확하게 알아봐주는 의사를 만나고, 별에별 검사를 다 받아가며 한 발자국씩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었다. 그 경험과 닿아 있기 때문에 정말로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고 좋았던 장면이었다. 아무리 비극적이더라도, 아무리 더럽고 부정하고 싶은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스스로를 솔직하게 대면할수록 성장하고 그 비극을 극복해 나간다고 생각한다. 매우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인간 존재의 가치는 역경을 뚫고 나아가다 설령 죽는다 하여도 그 과정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패럴림픽 선수들을 보면서 느끼는 인간 승리의 감정이 내가 추구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것을 회피하여 무의식 밑에다 묵히기 시작하면 중년 쯤 되어서 폭발하는 것 같다. 잘 살다가 문득 자살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내게 조커는 정말로 개인적이고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사회적, 정치적 해석은 나에겐 무의미하다. 아마 와킨 피닉스도 토드 필립스도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리라 생각한다. 아서의 얼굴 표정 클로즈업이 두드러지게 많은 점, 수 많은 폭도들 누구도 인간적으로, 실존하는 존재로써 카메라에 들어오지 못한 점을 볼 때 더욱 그렇다. 그들은 그저 배경일 뿐이고 아서에게 환호를 보내지만 그 또한 아서를 인간으로 이해하지 못하고(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아서 본인은 생각지도 않은 전복적 혁명 아이콘으로 본다는 것은 끝내 아서가 세상에 ‘이해받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에게 영화 조커는 시대와 배경을 초월한 오이디푸스적 인간 비극이지 2019년 트럼프가 통치하는 미국의 백인 루저 맥락에서 이해되는 영화가 아니다. 조커라는 코믹스 캐릭터조차도 형식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코믹스 히어로 무비도 아니고 배트맨 시리즈와도 관계 없다. 이 영화는 인간과 부모자식의 혈연과 비극에 관한 영화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이 말이 뼈에 사무친다. 이 영화는 개인이 살아온 인생의 경험과 색깔에 따라 매우 다른 깊이들로 이해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너무 미친 정신병자라 이해도 몰입도 안되는 분들은 다행이다. 그것은 결코 좋은것은 아니다. 모두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자기 인생을 짊어지고 산다. 그런데 가끔 유별나게 희한한 조합(비극적 조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유별나게 가슴을 때리고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나와 비슷하게 느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에게 손을 건내고 싶다. 악수를 하자. 참 기특하게도 살아냈구나. 나보다 어린 10대 20대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형님이라면 술 한잔 사달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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